이 책은 영화와 영상에 대한 오늘날의 여러 이론적, 비평적 논의와 문제를 다루는 입문서다. 특히 영화 애호가나 전공자들 외에도 교양 독자 일반과 타 분야의 다양한 예술 분야의 작업자들에게도 유용하도록 차분히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용어와 역사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통상적인 입문서가 아니며,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영화하는가?’ 라는 세 가지 무거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역사와 동시대적인 사유로 독자를 안내하는, 기이하고 묵직한 이론서이기도 하다.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영화하는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와 정면 대결하는, 다소 기이한 영화 입문서
다소 길고 기이한 제목을 단 이 책의 목차는 단 세 줄의 의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각각 영화를 이해하는 것과 보고 비평하는 것, 그리고 실천하는 일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즉 이 책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며, 그것들에 대한 이론적, 비평적 논의들을 밀도 높게 소개하고, 이를 동시대의 관점에서 재정의하거나 때로는 진중하게 비판한다. 영화에 대한 전통적인 사유와 대결하고 최신의 논의를 소개하는 이 책의 진중함은 우리가 ‘입문서’를 상상할 때 흔히 떠올리는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책은 시종일관 영화 ‘입문서’를 표방하고 있다. 저자인 영화평론가 유운성은 서문의 첫머리에서 이 책이 ‘특정 분야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 하는 이들보다는 교양 독자 일반을 대상으로 구성된’, ‘교과서보다는 교양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저자가 통상적인 입문서의 서술 방식을 대단히 ‘모욕적’으로 생각한다는 데 있다. 즉 그가 ‘수식이나 전문 용어를 빼고 추론의 과정을 생략하고 흥미를 돋구는 결과만을 요약하고, 최신 동향에 대한 정보와 잡기를 곁들인’ 책을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입문서’란 무엇인가?
- 독자의 지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즉 미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기
유운성은 ‘독자의 지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즉 ‘미래에 대한 믿음’에서 이 책을 서술했다고 말한다. 즉 입문서는 ‘핵심적 물음을 둘러싸고 펼치는 방법적 모색의 과정들 자체를 독자가 오롯이 체험할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하며, 자신이 대결하려는 문제의 한복판으로 독자를 인도해야 한다. 각각의 이론적 도구를 떠받치는 정리와 추론 자체에 독자를 깊숙이 끌어들이면서, 핵심적 물음을 둘러싼 논쟁과도 끊임없이 대면하게끔 해야 한다.
즉 이 책의 독자는 영화와 영상 일반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하는 이들로 가정된다. 대체로 한국어로 씌어진 영화 입문서는 영화를 창작하거나 비평적으로 사유하려는 이들이 아닌, 즐기려 하는 이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이 책 역시 그런 즐거움에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독자를 단순히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측면에 머무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책은 단순히 용어와 개념을 ‘가르치기’보다는 독자와 함께 영화가 변화하는 양상과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 그리고 영화를 사유한 이들의 문제의식에까지 도달하려 한다.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독자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의미다.
영화란 무엇인가 - 영화의 전통적인 역사와 사유를 동시대로 끌어오기
오늘날의 영상은 공연과 미술, 건축, 음악, 심지어는 문학에 이르는 여러 예술 장르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제는 미술관이나 공연장, 연극 무대에서 모니터나 스크린을 보게 되는 일은 더 이상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만큼 각각의 예술 분야에서 영상과 관련된 여러 실험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화나 영상에 대한 담론들은 이처럼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만나게 되는 영상 이미지를 사유할 적절한 개념들을 아직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이 책은 영화와 영상을 둘러싼 오늘날의 이론적, 비평적 논의를 조건 짓는 기본적인 문제를 다시 파악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역량’과 ‘유령’이라는 개념을 다시 설정하고 앙드레 바쟁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고전적 논의를 이러한 개념 아래 다시 검토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고유의 특성을 지니지 못하게 하는 영화의 비실체성, 즉 사실상 모든 예술의 조건이 되는 영화적 특성을 다시 가늠하게 한다.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영화하는가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 영화를 깊이 사유했던 세 명-앙드레 바쟁, 장뤽 고다르,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논의를 설명하고 그것들과 때로는 정면으로 대결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그들의 고민과 관심사가 현대적인 논의와 맞닿아 있으며, 우리에게 깊은 이론적 가능성과 미로를 동시에 제공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즉 저자는 동시대 영화감독이나 비평가라면 누구든 참조하거나 의식할 수밖에 없는 세 명의 이론을 독자와 함께 이해하고, 그 해석을 두고 벌어졌던 역사적 논쟁과, 현대 미디어 연구의 접점이 뒤엉킨 어떤 곳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가령 일반적인 입문서들처럼 단순히 몽타주와 미장센이라는 조악한 개념적 대비로 에이젠슈테인이나 바쟁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데, 이는 그들의 이론이 어떤 절충주의와 극단주의를 오가며 독특한 사유를 펼쳐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이젠슈테인은 영화를 어떤 실체가 있는 장치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 그리고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영화는 명사적인 어떤 실체가 아니라 동사적인 활동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쇼트는 단순히 프레임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분절하는 전통적인 영화적 개념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의 덩어리(cluster)를 어떻게 배치하고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에 가깝다. 즉 이는 예술 일반, 혹은 나아가 세계 일반과 관련된 수행의 원리이기도 하다. 유운성은 에이젠슈테인이 후기에 제안한 ‘오브라즈’와 ‘이조브라제니에’라는 개념쌍을 재검토하고, 그것의 이론적 유용성과 문제적 지점을 함께 짚는다.
“나는 진정한 입문서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꽤 명확한 상을 지니고 있다”(유운성)
이는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이 전통적인 영화를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오늘날의 3D와 VR, 미술관의 무빙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일정 부분 유효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와 연극을 동시에 사유했고 입체영화를 상상했던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적 개념들은 현대의 VR이나 가상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듬어져 있다. 나아가 영상을 무대나 전시장 등 영화관이 아닌 공간에 배치할 때의 이론적 틀거리가 아직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에이젠슈테인의 개념들은 충분히 동시대의 비평적 논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저자의 목표는 그런 과거의 에이젠슈테인을 다시 읽자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안온한 학습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것에 있지 않다. 이 책은 에이젠슈테인이 영화를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연계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의도는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아가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을 그가 하지 않은 방식으로 접합해서 읽는’ 비평적 사유에까지 독자들과 함께 나아가려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단 에이젠슈테인 뿐 아니라 고다르와 바쟁, 그리고 영화의 역사와 이론에서 있었던 주요한 국면과 이론가, 비평가, 감독들의 논의, 현대 미디어 이론을 함께 다루며 이 책은 변화하는 영화와 무빙 이미지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다시 검토하려 한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소수의 연구자들 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영역의 젊은 연구자들, 학생들, 창작자들을 영화와 영상을 이해하는 동시대적 문제틀로 이끈다. 이 책을 지금까지는 없었던 완고하고 밀도 높은 영화 ‘입문서’로 만드는 것은, 독자를 철저하게 믿는 필자의 투철한 희망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희망의 기이하고 단호한 궤적이자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영화와 영상에 대한 오늘날의 여러 이론적, 비평적 논의와 문제를 다루는 입문서다. 특히 영화 애호가나 전공자들 외에도 교양 독자 일반과 타 분야의 다양한 예술 분야의 작업자들에게도 유용하도록 차분히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용어와 역사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통상적인 입문서가 아니며,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영화하는가?’ 라는 세 가지 무거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역사와 동시대적인 사유로 독자를 안내하는, 기이하고 묵직한 이론서이기도 하다.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영화하는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와 정면 대결하는, 다소 기이한 영화 입문서
다소 길고 기이한 제목을 단 이 책의 목차는 단 세 줄의 의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각각 영화를 이해하는 것과 보고 비평하는 것, 그리고 실천하는 일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즉 이 책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며, 그것들에 대한 이론적, 비평적 논의들을 밀도 높게 소개하고, 이를 동시대의 관점에서 재정의하거나 때로는 진중하게 비판한다. 영화에 대한 전통적인 사유와 대결하고 최신의 논의를 소개하는 이 책의 진중함은 우리가 ‘입문서’를 상상할 때 흔히 떠올리는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책은 시종일관 영화 ‘입문서’를 표방하고 있다. 저자인 영화평론가 유운성은 서문의 첫머리에서 이 책이 ‘특정 분야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 하는 이들보다는 교양 독자 일반을 대상으로 구성된’, ‘교과서보다는 교양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저자가 통상적인 입문서의 서술 방식을 대단히 ‘모욕적’으로 생각한다는 데 있다. 즉 그가 ‘수식이나 전문 용어를 빼고 추론의 과정을 생략하고 흥미를 돋구는 결과만을 요약하고, 최신 동향에 대한 정보와 잡기를 곁들인’ 책을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입문서’란 무엇인가?
- 독자의 지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즉 미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기
유운성은 ‘독자의 지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즉 ‘미래에 대한 믿음’에서 이 책을 서술했다고 말한다. 즉 입문서는 ‘핵심적 물음을 둘러싸고 펼치는 방법적 모색의 과정들 자체를 독자가 오롯이 체험할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하며, 자신이 대결하려는 문제의 한복판으로 독자를 인도해야 한다. 각각의 이론적 도구를 떠받치는 정리와 추론 자체에 독자를 깊숙이 끌어들이면서, 핵심적 물음을 둘러싼 논쟁과도 끊임없이 대면하게끔 해야 한다.
즉 이 책의 독자는 영화와 영상 일반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하는 이들로 가정된다. 대체로 한국어로 씌어진 영화 입문서는 영화를 창작하거나 비평적으로 사유하려는 이들이 아닌, 즐기려 하는 이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이 책 역시 그런 즐거움에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독자를 단순히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측면에 머무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책은 단순히 용어와 개념을 ‘가르치기’보다는 독자와 함께 영화가 변화하는 양상과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 그리고 영화를 사유한 이들의 문제의식에까지 도달하려 한다.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독자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의미다.
영화란 무엇인가 - 영화의 전통적인 역사와 사유를 동시대로 끌어오기
오늘날의 영상은 공연과 미술, 건축, 음악, 심지어는 문학에 이르는 여러 예술 장르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제는 미술관이나 공연장, 연극 무대에서 모니터나 스크린을 보게 되는 일은 더 이상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만큼 각각의 예술 분야에서 영상과 관련된 여러 실험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화나 영상에 대한 담론들은 이처럼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만나게 되는 영상 이미지를 사유할 적절한 개념들을 아직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이 책은 영화와 영상을 둘러싼 오늘날의 이론적, 비평적 논의를 조건 짓는 기본적인 문제를 다시 파악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역량’과 ‘유령’이라는 개념을 다시 설정하고 앙드레 바쟁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고전적 논의를 이러한 개념 아래 다시 검토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고유의 특성을 지니지 못하게 하는 영화의 비실체성, 즉 사실상 모든 예술의 조건이 되는 영화적 특성을 다시 가늠하게 한다.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영화하는가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 영화를 깊이 사유했던 세 명-앙드레 바쟁, 장뤽 고다르,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논의를 설명하고 그것들과 때로는 정면으로 대결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그들의 고민과 관심사가 현대적인 논의와 맞닿아 있으며, 우리에게 깊은 이론적 가능성과 미로를 동시에 제공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즉 저자는 동시대 영화감독이나 비평가라면 누구든 참조하거나 의식할 수밖에 없는 세 명의 이론을 독자와 함께 이해하고, 그 해석을 두고 벌어졌던 역사적 논쟁과, 현대 미디어 연구의 접점이 뒤엉킨 어떤 곳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가령 일반적인 입문서들처럼 단순히 몽타주와 미장센이라는 조악한 개념적 대비로 에이젠슈테인이나 바쟁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데, 이는 그들의 이론이 어떤 절충주의와 극단주의를 오가며 독특한 사유를 펼쳐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이젠슈테인은 영화를 어떤 실체가 있는 장치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 그리고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영화는 명사적인 어떤 실체가 아니라 동사적인 활동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쇼트는 단순히 프레임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분절하는 전통적인 영화적 개념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의 덩어리(cluster)를 어떻게 배치하고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에 가깝다. 즉 이는 예술 일반, 혹은 나아가 세계 일반과 관련된 수행의 원리이기도 하다. 유운성은 에이젠슈테인이 후기에 제안한 ‘오브라즈’와 ‘이조브라제니에’라는 개념쌍을 재검토하고, 그것의 이론적 유용성과 문제적 지점을 함께 짚는다.
“나는 진정한 입문서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꽤 명확한 상을 지니고 있다”(유운성)
이는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이 전통적인 영화를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오늘날의 3D와 VR, 미술관의 무빙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일정 부분 유효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와 연극을 동시에 사유했고 입체영화를 상상했던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적 개념들은 현대의 VR이나 가상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듬어져 있다. 나아가 영상을 무대나 전시장 등 영화관이 아닌 공간에 배치할 때의 이론적 틀거리가 아직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에이젠슈테인의 개념들은 충분히 동시대의 비평적 논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저자의 목표는 그런 과거의 에이젠슈테인을 다시 읽자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안온한 학습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것에 있지 않다. 이 책은 에이젠슈테인이 영화를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연계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의도는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아가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을 그가 하지 않은 방식으로 접합해서 읽는’ 비평적 사유에까지 독자들과 함께 나아가려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단 에이젠슈테인 뿐 아니라 고다르와 바쟁, 그리고 영화의 역사와 이론에서 있었던 주요한 국면과 이론가, 비평가, 감독들의 논의, 현대 미디어 이론을 함께 다루며 이 책은 변화하는 영화와 무빙 이미지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다시 검토하려 한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소수의 연구자들 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영역의 젊은 연구자들, 학생들, 창작자들을 영화와 영상을 이해하는 동시대적 문제틀로 이끈다. 이 책을 지금까지는 없었던 완고하고 밀도 높은 영화 ‘입문서’로 만드는 것은, 독자를 철저하게 믿는 필자의 투철한 희망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희망의 기이하고 단호한 궤적이자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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