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아플 것이다.
아프다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이가 아니었고
지금은 아직 그 아이이다.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 슬픈 음악, 슬픈 그림이다. 정나란의 소설 『네 손이 내 눈을 덮을 때』는 슬픔을 그린 소설이지만 마냥 슬프기만 한 소설은 아니다. 유년 시절의 기억과 상처, 설렘과 쓰라림,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정나란의 글쓰기는 우리를 망각의 강 ‘레테’ 건너편으로 인도하는 뱃사공이 되기를 자처한다.
정나란의 소설을 읽는 사람은 그 내밀한 글쓰기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상실의 그림자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 감당하던 외로움과 그리움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소설 속 기의 외딴 집에 모이던 태, 범, 은, 미, 진, 혜와 같은 아이들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더하고 싶어진다.
작가는 일찍 죽은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과 같은 느낌으로 존재하는 소리 없는 사람들, 작은 은둔자들을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은둔은 “기꺼이 살아내고 싶은 세상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이 섞인 눈길”에 가깝다. 모든 경험의 시원인 고향,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향을 확인하고 싶었다던 작가는 “결국 사람들이 유년으로 돌아가서 찾아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유년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슬픔을 동반한다. “슬픈 이야기만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슬픔이 살이 벗겨진 자리처럼 아픈 곳을 자꾸 알려주고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는 작가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에서 아픈 자리를 더듬어야만 아프구나 아프구나 결국 말하게 될 것이고, 결국 당신의 얼굴을 잊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죽은 사람들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고 아직 이곳에서 나의 슬픔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아는 이들, 아프지만 그 아픔이 말로 표현되지 않아 죽은 사람들을 떠나보내지 못한 이들에게 이 소설은 함께 흘리는 눈물이자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추천의 글
많은 사람들이 죽고 우리는 살아 있어서 작가는 이 소설을 썼고 나는 읽었다. 유년의 기억은 지나가지 않고 영원이 되어 우리의 뼈와 살을 이룬다. 그때 이미 이해했던 것처럼 우리도 죽을 것이고 썩어 흩어져 작은 빛으로 멸할 것이다. 그때 이미 이해했다는 것을 당신은 기억하나. 그때 우리는 아이가 아니었고 지금은 아직 그 아이이다. 그때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들이 언어를 비껴간다. 그때. 헝겊으로 눈을 가린 채 더듬어 찾던 이들 중 당신이 있었더라면. 그 안락한 어둠 속에서 당신을 잡았지만 눈을 뜨니 가고 없던 거라면. 그때 우리는 함께 있었던 거다. 서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아플 것이다. 아프다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투명하다는 것을, 꿈의 이쪽과 저쪽 사이도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가 벗어 두고 온 우리 자신이었던 피막들이 나비처럼 허공에 흩날릴 때 죽은 사람들은 아직 이곳에 있고 나도 죽음 후에 당신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때처럼 다시 이해하기 때문이다.
— 목정원, 작가
태어나 자라는 시기의 우리에게 말의 능력이 충분히 주어져 있지 않고 망각은 기억보다 활발하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가. 바깥의 모든 사건이 무방비의 온몸과 마음에 들이쳐 여전히 욱신거리는 상흔을 남겼는데, 그것의 기원을 아주 나중에야 집요한 회고로나마 겨우 복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비분한가.
어린 시절에 뒤늦은 말을, 가장 존엄하고 정확한 말을, 주기. 망각을 등지고 켜켜이 기억해내기. 설렘, 두근거림, 무서움, 쓰라림, 부끄러움, 그리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이 모든 감정과 감각을 다시 겪으며 어지럽게 흔들리기. 정나란의 글쓰기는 이를 함께 감행하자고 청한다.
나는 끝없이 밑줄을 쳤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어서 잠자리에 들어 읽다 만 부분에 연이은 꿈을 꾸고 싶었다. 나는 기의 집에 모이는 아이들에 윤의 이름을 더하고 싶었다. 나만은 아닐 것이다.
— 윤경희, 문학평론가
책 속에서
기가 내 눈을 천으로 덮을 때, 그 천이 내 눈을 누르는 동안 나는 기의 완전무결한 손놀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매번 같은 정도의 압박만을 느끼게끔 힘을 조절할 줄 알았다. 그는 고작 열두 살인데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느낌들을 내게 전달하는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기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 같았다. 나는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쌓아놓은 빨랫감들을 개키면서 기가 되는 연습을 했다. 기에게 배운 것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지금부터 기다. (본문 17쪽)
나는 그 물 안에서 조금 자랐던 것 같다. 그의 연못은 무언가를 보호하고 길러내주는 곳이었다. 사라질 듯 미미한 사이들을 흐르며 감싸는 곳이었다. 아픈 자리로 스며드는 뜨스한 온도가 허물어진 곳으로 둥글게 들어오며 마음을 안심시키듯, 개들이 살갗이 붉게 드러난 자신의 다리를 혀로 정성껏 핥아내듯, 그의 연못이 나를 감싸고 있는 동안 다친 자리들에 새살이 돋아나고 생장점에 물이 스미듯 열기와 함께 살 같은 기쁨이 고요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본문 37쪽)
우리 모두 스스로의 성장에 공포를 느꼈다. 언젠가 이 시간을 끝낼 것이다. 언덕의 막바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어느 생생한 봄날을 우리의 뇌리에서, 정신 속에서 마주할 것이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성장을 느낄 때 한 세계의 낯선 표정을 보듯 두려웠다. (본문 40쪽)
더 늦기 전에 나는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옷을 벗는 법을 떠올린다. 뱀의 허물을 그리듯 떠올리며 내 허물을 벗어내는 연습을 한다. 내게도 피막과 같은 보이지 않는 막이 있다. 그 막은 진짜 ‘나’이다. 집으로 갈 때 나는 진짜 나를 벗어두고 간다. 그것이 내게 필요하다. 단지 폭력이나 미움, 무관심에 대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의 일부는 이 평원의 더 너른 곳을 다녀와야 한다. 내가 밤에 누리지 못하는 모험과 덧없는 경계의 드나듦을 경험해야 한다. 그것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무디게 자라나는 빛깔로 이뤄져 있다. 지평선과 수평선까지 내가 벗어둔 얇은 막은 나를 벗어나 나만큼의 무게를 잃고 날아오른다. 그 얇은 장막이 펼쳐져 새로운 날이 오면 새로운 상처를 얻은 내 몸에 와서 다시 하나가 되어 스민다. 그러면 나는 밖으로 나가 들을 걷고 강둑을 달려 기의 집에 다시 갈 수 있다. (본문 45쪽)
아이들 중 어제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서너 명이 있다. 그들은 얼굴에 상처를 지녔거나 상처가 없더라도 어딘지 움푹 파인 표정을 하고 있다. 유독 말수가 줄어들었거나 지붕을 뚫고 나가고 싶은 사람처럼 소란을 피우는 아이가 있다. 우리는 그 모든 변화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한번은 내가 그 소란을 피우게 될 것이다. 한번은 나의 말이 줄어들 것이다. 한번은 강둑에 몹쓸 바람이 불고 내가 그 바람을 잔뜩 머금고 들어와 이 방 안의 공기를 흩트릴 것이다. 지난 저물녘 내가 벗어둔 얇은 막이 어떤 곳을 돌아 왔을지 나는 알 수 없다. 한 아이가 자정에 칼자루를 입에 물고 대야에 받은 물을 들여다보면 미래의 신랑감이 보인다는 말을 한다. 어쩌면 내 얇은 막은 밤에 내가 모르는 미래의 내 운명의 사람들을 모두 거치고 오는 것일까. 그들은 내게 지금 필요한 양분을 조금씩 내주고 나는 그 양분을 얻어 다시 오늘을 맞는 것인가. 그렇게 아득한 곳으로 흘러갈 수 있는 사람이 나인 것을 잊지 않을 때 안전해지는 기분을 얻는다. 그리고 주변의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본다. 눈빛으로 모두의 얼굴을 쓰다듬고 내가 가진 온기를 내주고 싶다. 안전하기를. 내일은 저 얼굴의 파인 곳에 차오르는 부드러운 살결이 온몸을 빛나게 하는 효과를 낼 수 있기를. (본문 46쪽)
아홉 살의 나는 매일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게 안타까웠다. 바보같이 죽지도 못하면서 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지. 밤에는 상상을 하지 말고 어서 꿈으로 가도록 하자. 꿈은 대체로 좋으니까. 꿈에서 깨지 않을 방법을 찾을지도 몰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잠이 들 때 엄마가 기도를 하라고 하면 기도를 했다. 그 기도는 깊고 길었다. 하나님에게 나는 빌었다. 내가 사실 이 꿈속으로 잘못 들어온 것을 알고 있다고, 언젠가는 내 진짜 현실이 꿈으로 오게 될 것임을 안다고, 그 꿈이 내게 당도하는 날, 내가 거기 머물게 해달라고. 나는 양 떼 사이에 있던 양 한 마리일지 모른다. 나는 너른 풀밭의 바위일지 모른다. 얼마나 간절히 바위이길 원하는가. 나는 송사리, 만약 오래 살 수 있다면 바다거북일지 모른다. 대양의 깊은 곳에서 잠을 자다가 잘못된 꿈으로 들어온 것일지 모른다. 나는 꿈이 펼치는 가능성 중, 그 생각하지 못한 여러 장면들의 교차들 중 충분히 내가 들어갈 현실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가령 범과 태가 수풀로 사라진 어느 날, 그들은 자신들이 온 곳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나를 비롯한 이곳의 모든 아이들이 일정 부분 고향을 벗어나, 그들의 고유한 현실을 벗어나 잘못떨어진 운석처럼 여기 놓여 있다. 그 운석의 가장자리를 어느 날 길을 걷던 노인이 만진다. 우리는 그 운석의 돌가루 같은 것이다. 운석의 떼어져 나간 부분에서 하나의 결속으로 맺어졌던 우리는 벗겨지고 멀리 날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장면으로 다시 모인 것이 지금이다. (본문 124쪽)
너의 다친 손등이 떠오르는 날이면 나비를 떠올렸다. 너의 손등 위에 앉는 나비를 보았던 것 같다. 그 나비는 네가 손등에 상처를 입고 온 날, 눈으로 떠올리듯 상처 위에 앉도록 그려본 것이었다. 이후로 너의 손등에는 나비가 산다. 너를 오래 보지 못하고서 다시 보았을 때 여전히 너의 손등에 나비가 있는 것을 보았다. 흰빛과 노란빛 사이, 나비는 가벼이 떠돌다가 너의 손등 아픈 자리에 내려앉는다. 내가 그것을 보는 동안 너는 나비처럼 웃는다. 그 웃음이 아파서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나도 웃는다. 나는 웃는 것을 어느 날 배웠다. 내가 웃는 것을 네가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후 나는 웃음을 연습했다. 네 옆의 허공에, 내가 보지 않는 곳에 나비가 날고 있다는 것을 네가 아직 모르고 있을 때 나는 어쩌면 우리가 다른 꿈으로 들어오는 것에 성공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본문 136쪽)











서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아플 것이다.
아프다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이가 아니었고
지금은 아직 그 아이이다.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 슬픈 음악, 슬픈 그림이다. 정나란의 소설 『네 손이 내 눈을 덮을 때』는 슬픔을 그린 소설이지만 마냥 슬프기만 한 소설은 아니다. 유년 시절의 기억과 상처, 설렘과 쓰라림,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정나란의 글쓰기는 우리를 망각의 강 ‘레테’ 건너편으로 인도하는 뱃사공이 되기를 자처한다.
정나란의 소설을 읽는 사람은 그 내밀한 글쓰기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상실의 그림자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 감당하던 외로움과 그리움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소설 속 기의 외딴 집에 모이던 태, 범, 은, 미, 진, 혜와 같은 아이들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더하고 싶어진다.
작가는 일찍 죽은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과 같은 느낌으로 존재하는 소리 없는 사람들, 작은 은둔자들을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은둔은 “기꺼이 살아내고 싶은 세상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이 섞인 눈길”에 가깝다. 모든 경험의 시원인 고향,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향을 확인하고 싶었다던 작가는 “결국 사람들이 유년으로 돌아가서 찾아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유년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슬픔을 동반한다. “슬픈 이야기만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슬픔이 살이 벗겨진 자리처럼 아픈 곳을 자꾸 알려주고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는 작가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에서 아픈 자리를 더듬어야만 아프구나 아프구나 결국 말하게 될 것이고, 결국 당신의 얼굴을 잊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죽은 사람들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고 아직 이곳에서 나의 슬픔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아는 이들, 아프지만 그 아픔이 말로 표현되지 않아 죽은 사람들을 떠나보내지 못한 이들에게 이 소설은 함께 흘리는 눈물이자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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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죽고 우리는 살아 있어서 작가는 이 소설을 썼고 나는 읽었다. 유년의 기억은 지나가지 않고 영원이 되어 우리의 뼈와 살을 이룬다. 그때 이미 이해했던 것처럼 우리도 죽을 것이고 썩어 흩어져 작은 빛으로 멸할 것이다. 그때 이미 이해했다는 것을 당신은 기억하나. 그때 우리는 아이가 아니었고 지금은 아직 그 아이이다. 그때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들이 언어를 비껴간다. 그때. 헝겊으로 눈을 가린 채 더듬어 찾던 이들 중 당신이 있었더라면. 그 안락한 어둠 속에서 당신을 잡았지만 눈을 뜨니 가고 없던 거라면. 그때 우리는 함께 있었던 거다. 서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아플 것이다. 아프다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투명하다는 것을, 꿈의 이쪽과 저쪽 사이도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가 벗어 두고 온 우리 자신이었던 피막들이 나비처럼 허공에 흩날릴 때 죽은 사람들은 아직 이곳에 있고 나도 죽음 후에 당신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때처럼 다시 이해하기 때문이다.
— 목정원, 작가
태어나 자라는 시기의 우리에게 말의 능력이 충분히 주어져 있지 않고 망각은 기억보다 활발하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가. 바깥의 모든 사건이 무방비의 온몸과 마음에 들이쳐 여전히 욱신거리는 상흔을 남겼는데, 그것의 기원을 아주 나중에야 집요한 회고로나마 겨우 복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비분한가.
어린 시절에 뒤늦은 말을, 가장 존엄하고 정확한 말을, 주기. 망각을 등지고 켜켜이 기억해내기. 설렘, 두근거림, 무서움, 쓰라림, 부끄러움, 그리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이 모든 감정과 감각을 다시 겪으며 어지럽게 흔들리기. 정나란의 글쓰기는 이를 함께 감행하자고 청한다.
나는 끝없이 밑줄을 쳤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어서 잠자리에 들어 읽다 만 부분에 연이은 꿈을 꾸고 싶었다. 나는 기의 집에 모이는 아이들에 윤의 이름을 더하고 싶었다. 나만은 아닐 것이다.
— 윤경희, 문학평론가
책 속에서
기가 내 눈을 천으로 덮을 때, 그 천이 내 눈을 누르는 동안 나는 기의 완전무결한 손놀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매번 같은 정도의 압박만을 느끼게끔 힘을 조절할 줄 알았다. 그는 고작 열두 살인데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느낌들을 내게 전달하는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기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 같았다. 나는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쌓아놓은 빨랫감들을 개키면서 기가 되는 연습을 했다. 기에게 배운 것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지금부터 기다. (본문 17쪽)
나는 그 물 안에서 조금 자랐던 것 같다. 그의 연못은 무언가를 보호하고 길러내주는 곳이었다. 사라질 듯 미미한 사이들을 흐르며 감싸는 곳이었다. 아픈 자리로 스며드는 뜨스한 온도가 허물어진 곳으로 둥글게 들어오며 마음을 안심시키듯, 개들이 살갗이 붉게 드러난 자신의 다리를 혀로 정성껏 핥아내듯, 그의 연못이 나를 감싸고 있는 동안 다친 자리들에 새살이 돋아나고 생장점에 물이 스미듯 열기와 함께 살 같은 기쁨이 고요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본문 37쪽)
우리 모두 스스로의 성장에 공포를 느꼈다. 언젠가 이 시간을 끝낼 것이다. 언덕의 막바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어느 생생한 봄날을 우리의 뇌리에서, 정신 속에서 마주할 것이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성장을 느낄 때 한 세계의 낯선 표정을 보듯 두려웠다. (본문 40쪽)
더 늦기 전에 나는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옷을 벗는 법을 떠올린다. 뱀의 허물을 그리듯 떠올리며 내 허물을 벗어내는 연습을 한다. 내게도 피막과 같은 보이지 않는 막이 있다. 그 막은 진짜 ‘나’이다. 집으로 갈 때 나는 진짜 나를 벗어두고 간다. 그것이 내게 필요하다. 단지 폭력이나 미움, 무관심에 대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의 일부는 이 평원의 더 너른 곳을 다녀와야 한다. 내가 밤에 누리지 못하는 모험과 덧없는 경계의 드나듦을 경험해야 한다. 그것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무디게 자라나는 빛깔로 이뤄져 있다. 지평선과 수평선까지 내가 벗어둔 얇은 막은 나를 벗어나 나만큼의 무게를 잃고 날아오른다. 그 얇은 장막이 펼쳐져 새로운 날이 오면 새로운 상처를 얻은 내 몸에 와서 다시 하나가 되어 스민다. 그러면 나는 밖으로 나가 들을 걷고 강둑을 달려 기의 집에 다시 갈 수 있다. (본문 45쪽)
아이들 중 어제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서너 명이 있다. 그들은 얼굴에 상처를 지녔거나 상처가 없더라도 어딘지 움푹 파인 표정을 하고 있다. 유독 말수가 줄어들었거나 지붕을 뚫고 나가고 싶은 사람처럼 소란을 피우는 아이가 있다. 우리는 그 모든 변화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한번은 내가 그 소란을 피우게 될 것이다. 한번은 나의 말이 줄어들 것이다. 한번은 강둑에 몹쓸 바람이 불고 내가 그 바람을 잔뜩 머금고 들어와 이 방 안의 공기를 흩트릴 것이다. 지난 저물녘 내가 벗어둔 얇은 막이 어떤 곳을 돌아 왔을지 나는 알 수 없다. 한 아이가 자정에 칼자루를 입에 물고 대야에 받은 물을 들여다보면 미래의 신랑감이 보인다는 말을 한다. 어쩌면 내 얇은 막은 밤에 내가 모르는 미래의 내 운명의 사람들을 모두 거치고 오는 것일까. 그들은 내게 지금 필요한 양분을 조금씩 내주고 나는 그 양분을 얻어 다시 오늘을 맞는 것인가. 그렇게 아득한 곳으로 흘러갈 수 있는 사람이 나인 것을 잊지 않을 때 안전해지는 기분을 얻는다. 그리고 주변의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본다. 눈빛으로 모두의 얼굴을 쓰다듬고 내가 가진 온기를 내주고 싶다. 안전하기를. 내일은 저 얼굴의 파인 곳에 차오르는 부드러운 살결이 온몸을 빛나게 하는 효과를 낼 수 있기를. (본문 46쪽)
아홉 살의 나는 매일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게 안타까웠다. 바보같이 죽지도 못하면서 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지. 밤에는 상상을 하지 말고 어서 꿈으로 가도록 하자. 꿈은 대체로 좋으니까. 꿈에서 깨지 않을 방법을 찾을지도 몰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잠이 들 때 엄마가 기도를 하라고 하면 기도를 했다. 그 기도는 깊고 길었다. 하나님에게 나는 빌었다. 내가 사실 이 꿈속으로 잘못 들어온 것을 알고 있다고, 언젠가는 내 진짜 현실이 꿈으로 오게 될 것임을 안다고, 그 꿈이 내게 당도하는 날, 내가 거기 머물게 해달라고. 나는 양 떼 사이에 있던 양 한 마리일지 모른다. 나는 너른 풀밭의 바위일지 모른다. 얼마나 간절히 바위이길 원하는가. 나는 송사리, 만약 오래 살 수 있다면 바다거북일지 모른다. 대양의 깊은 곳에서 잠을 자다가 잘못된 꿈으로 들어온 것일지 모른다. 나는 꿈이 펼치는 가능성 중, 그 생각하지 못한 여러 장면들의 교차들 중 충분히 내가 들어갈 현실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가령 범과 태가 수풀로 사라진 어느 날, 그들은 자신들이 온 곳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나를 비롯한 이곳의 모든 아이들이 일정 부분 고향을 벗어나, 그들의 고유한 현실을 벗어나 잘못떨어진 운석처럼 여기 놓여 있다. 그 운석의 가장자리를 어느 날 길을 걷던 노인이 만진다. 우리는 그 운석의 돌가루 같은 것이다. 운석의 떼어져 나간 부분에서 하나의 결속으로 맺어졌던 우리는 벗겨지고 멀리 날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장면으로 다시 모인 것이 지금이다. (본문 124쪽)
너의 다친 손등이 떠오르는 날이면 나비를 떠올렸다. 너의 손등 위에 앉는 나비를 보았던 것 같다. 그 나비는 네가 손등에 상처를 입고 온 날, 눈으로 떠올리듯 상처 위에 앉도록 그려본 것이었다. 이후로 너의 손등에는 나비가 산다. 너를 오래 보지 못하고서 다시 보았을 때 여전히 너의 손등에 나비가 있는 것을 보았다. 흰빛과 노란빛 사이, 나비는 가벼이 떠돌다가 너의 손등 아픈 자리에 내려앉는다. 내가 그것을 보는 동안 너는 나비처럼 웃는다. 그 웃음이 아파서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나도 웃는다. 나는 웃는 것을 어느 날 배웠다. 내가 웃는 것을 네가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후 나는 웃음을 연습했다. 네 옆의 허공에, 내가 보지 않는 곳에 나비가 날고 있다는 것을 네가 아직 모르고 있을 때 나는 어쩌면 우리가 다른 꿈으로 들어오는 것에 성공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본문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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