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프랑스 파리에서는 누구나 예술가가 되고, 낭만적인 사랑에 빠질 것만 같습니다. 낮이면 몽마르트르 언덕을 여유롭게 거닐며, 밤이면 빛이 내려앉은 센강 주변에서 자유를 만끽할 것만 같고요. 저자는 마치 그곳이 삶의 종착지인 것처럼,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프랑스 파리로 떠납니다. 그러나 여성, 아시아인, 이방인으로서,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에서 마주한 현실은 외롭고, 불편하고, 우울했습니다. 저자는 한 권에 걸쳐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그에 대한 답을 찾아 적어 내려갑니다. 무엇이 파리로 자신을 이끌었는지, 분명 녹록지 않은 삶이었는데 왜 서점의 책들은 낭만만을 이야기하는지,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건 자신뿐이었는지 말이죠. 3년간의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저자는 자신의 지난날을 어쩐지 ‘실패한 유학기’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럼에도 저자의 글에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미워했던 프랑스 파리에 관하여, 자주 울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버티게 한 것들에 관하여 솔직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아름다운 도시와 낭만의 이면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사랑과 외로움일지도 모릅니다.
작가 소개
이용빈
198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유학의 꿈을 위해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프랑스 후아이양(Royan)과 쁘와띠에(Poitiers)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한 후 파리8대학에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존재의 불안을 수많은 인용문으로 메꾸며 내 마음 받아줄 멋진 곳을 찾아 헤매다 결국 그것이 나 자신이라는 걸 발견했고, 인용하는 대신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추천의 글
영화를 만들고 여러 도시의 영화제를 다니면서 만난 친구들이 있다. 유학생이거나, 이민자들이거나, 혹은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이들. 사적인 교류 없이 헤어지는 일도 있지만 몇몇은 정말로 친구가 되었다. 한국을 끔찍이 증오했거나 사랑했던 이들. 그들을 감싸고 있는 알 수 없는 고독감과 낯선 땅에서 일구는 생존의 삶을 늘 동경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이용빈 작가와는 2015년 10월, 파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해 완성한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파리한국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그는 영화제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파리의 한국 유학생이었다. 당시 나는 몇 년간 무리하면서 작업을 이어온 상태라 거의 산송장인 채로 이곳저곳을 다니는 중이었다. 아, 사람이, 이렇게 과로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던 것 같다. 한 편만 만들고 죽을 건 아니잖아? 라는 말도 종종 들었다. (아니 환청이었나, 그러다 죽어, 그러다 죽는다고) 사람을 만날 때면 당분간 좀 쉬고 싶다는 말을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열심히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공항 서점에서 산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완전한 번아웃 상태로) 비행기 안에서 읽으면서, 다음 작업은 이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20대 후반의 직장인이 한국에서 이렇게 살다 간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초식동물의 신세가 될 거라고 예감한 뒤 호주 이민을 감행한다는 줄거리였다. 그에게도 정규직의 직장이, 귀엽고 성실한 애인이, 사랑하는 가족이 한국에 있었다. 예측 가능한 안온한 생활을 뒤로한 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낯선 땅으로 모험을 나선 주인공의 여정이 이상하리만치 내 가슴을 두드렸다. 그는 한국을 떠나서야 비로소 한국을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시공간을 확보한다. 그리고 행복해지겠다고 다짐한다.
이용빈 작가를 만나면서도 그 주인공을 떠올렸다. 영화제 동안 오가는 차 안에서, 길을 걸으며, 조촐히 치렀던 쫑파티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던 것 같다. 그는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는 타인의 말을 꼭꼭 주워 담듯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맞닿는 지점이 생기면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짧은 여행은 금세 끝이 났다. 그의 근황이 궁금해질 무렵에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간 취직을 했고 다시 퇴사한 것 같았다. 그리고 계속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책에는 그가 만난 짧고 긴 인연들이, 세심한 경청이, 생각의 되새김질이, 해 뜨기 전의 적요한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프랑스로 떠날 때는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그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도 궁금해진다. 그럼, 최선을 다해 다음 장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영화감독, 장건재
작가의 말
파리의 밤, 흐들흐들한 영혼들이 외로움에 밤새 몸을 꼬았다. 파리의 밤은 그렇게나 외로웠다.
실은 파리에 가기 전까진 제대로 외롭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회피할 수 있는 너무 많은 장치가 한국에 존재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불안함이나 외로움이 내 마음을 잠식하려고 하면 나는 아주 쉽게 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에서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삶. 손을 뻗으면 기댈 수 있는 것들이 나에겐 너무나 많아서 간간이 나를 잠식하곤 했던 상처 같은 건 모두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프랑스에, 유럽에, 파리에 진한 향수를 느꼈다. 그곳이 내 집인 것처럼, 내 삶이 거기 있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그곳에 가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는 허영에 가득 찬 마음이 파리로 나를 이끌었다. 똑같은 것이 지겹고 싫었던 마음의 이면에는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도 질려버리면 어쩌나, 변화 없이 지겨운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불안한 마음과 낮은 자존감에서 도망치고 회피하다 보면 결국 발 디딜 곳을 영원히 찾지 못하는 법이지만, 그때 나는 그걸 몰랐다.
반면 왜 그렇게 파리의 삶이 시궁창 같았을까를 생각해보면, 아마 ‘설국열차’ 삼등칸에서 꼬리칸으로 밀려나는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한국의 여성은 20대에 ‘젊음’과 ‘외모’라는 힘으로 유일하게 남자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다고 말했다. 그 찬란하던 시절, 좋았던 삶을 뒤로하고 더 나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곳으로 갈 때의 마음은 상상치 못한 인종차별과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행정 서류들과 절차, 가난과 외로움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똑똑한 학생,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좋은 사람, 멋진 인생에 포지셔닝 되어있던 삶이 사람들의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도움을 청해도 못 들은 척하는 스물셋 남짓한 아이들 속의 동양인 유학생 포지션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나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거나 타자의 위치를 상상해 볼 여지가 드물었다. 50여 명 빼곡히 찬 강의실 한 켠에 있던 한두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 농촌에 팔려 오듯 시집온 결혼이민자들, 굳이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인정받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감내하는 게 익숙해져 버린 어떤 부류의 사람들같이 이 사회에 존재하지만 나와 엮일 일이 없었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에 있었을까? 나 자신의 인정욕구에 급급했던 그 시절의 나는 그런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와 같은 시기에 파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감탄하는 프랑스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프랑스에서 받던 멸시가 사라지고, 친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한국에 왔는데, 나는 꿈꾸던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성공한 유학’인지 모르겠지만 ‘객관적으로’ 좋은 기업에 많은 연봉을 받는 직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것 같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쟁의 한복판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프랑스라는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온 난민처럼 벌거벗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 사회에서도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어깨를 잔뜩 위축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하면서도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더 이상 상처받기 싫었기에 경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상처를 통해 이상한 인류애를 얻었다. 한국이 마치 전체주의 나라처럼 느껴지는 건, 프랑스가 자유와 평등의 나라여서가 아니라, 한국은 프랑스보다 더 노골적인 형태로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상처받고 외롭고 인정받지 못했던 경험은 비단 나뿐이 아니라 나와 같은 시기에 있었던 파리 유학생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이상한 인류애의 실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 가끔 프랑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련해지곤 한다. 프랑스에 남은 이들은 한국의 이런 형태의 토탈리즘을 견딜 수가 없어 그대로 황무지에 남은 사람같이 느껴진다.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 노동당, 에이즈에 걸린 성 소수자, 다자연애자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프랑스에 남아있다.
책 소개
프랑스 파리에서는 누구나 예술가가 되고, 낭만적인 사랑에 빠질 것만 같습니다. 낮이면 몽마르트르 언덕을 여유롭게 거닐며, 밤이면 빛이 내려앉은 센강 주변에서 자유를 만끽할 것만 같고요. 저자는 마치 그곳이 삶의 종착지인 것처럼,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프랑스 파리로 떠납니다. 그러나 여성, 아시아인, 이방인으로서,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에서 마주한 현실은 외롭고, 불편하고, 우울했습니다. 저자는 한 권에 걸쳐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그에 대한 답을 찾아 적어 내려갑니다. 무엇이 파리로 자신을 이끌었는지, 분명 녹록지 않은 삶이었는데 왜 서점의 책들은 낭만만을 이야기하는지,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건 자신뿐이었는지 말이죠. 3년간의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저자는 자신의 지난날을 어쩐지 ‘실패한 유학기’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럼에도 저자의 글에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미워했던 프랑스 파리에 관하여, 자주 울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버티게 한 것들에 관하여 솔직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아름다운 도시와 낭만의 이면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사랑과 외로움일지도 모릅니다.
작가 소개
이용빈
198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유학의 꿈을 위해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프랑스 후아이양(Royan)과 쁘와띠에(Poitiers)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한 후 파리8대학에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존재의 불안을 수많은 인용문으로 메꾸며 내 마음 받아줄 멋진 곳을 찾아 헤매다 결국 그것이 나 자신이라는 걸 발견했고, 인용하는 대신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추천의 글
영화를 만들고 여러 도시의 영화제를 다니면서 만난 친구들이 있다. 유학생이거나, 이민자들이거나, 혹은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이들. 사적인 교류 없이 헤어지는 일도 있지만 몇몇은 정말로 친구가 되었다. 한국을 끔찍이 증오했거나 사랑했던 이들. 그들을 감싸고 있는 알 수 없는 고독감과 낯선 땅에서 일구는 생존의 삶을 늘 동경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이용빈 작가와는 2015년 10월, 파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해 완성한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파리한국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그는 영화제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파리의 한국 유학생이었다. 당시 나는 몇 년간 무리하면서 작업을 이어온 상태라 거의 산송장인 채로 이곳저곳을 다니는 중이었다. 아, 사람이, 이렇게 과로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던 것 같다. 한 편만 만들고 죽을 건 아니잖아? 라는 말도 종종 들었다. (아니 환청이었나, 그러다 죽어, 그러다 죽는다고) 사람을 만날 때면 당분간 좀 쉬고 싶다는 말을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열심히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공항 서점에서 산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완전한 번아웃 상태로) 비행기 안에서 읽으면서, 다음 작업은 이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20대 후반의 직장인이 한국에서 이렇게 살다 간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초식동물의 신세가 될 거라고 예감한 뒤 호주 이민을 감행한다는 줄거리였다. 그에게도 정규직의 직장이, 귀엽고 성실한 애인이, 사랑하는 가족이 한국에 있었다. 예측 가능한 안온한 생활을 뒤로한 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낯선 땅으로 모험을 나선 주인공의 여정이 이상하리만치 내 가슴을 두드렸다. 그는 한국을 떠나서야 비로소 한국을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시공간을 확보한다. 그리고 행복해지겠다고 다짐한다.
이용빈 작가를 만나면서도 그 주인공을 떠올렸다. 영화제 동안 오가는 차 안에서, 길을 걸으며, 조촐히 치렀던 쫑파티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던 것 같다. 그는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는 타인의 말을 꼭꼭 주워 담듯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맞닿는 지점이 생기면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짧은 여행은 금세 끝이 났다. 그의 근황이 궁금해질 무렵에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간 취직을 했고 다시 퇴사한 것 같았다. 그리고 계속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책에는 그가 만난 짧고 긴 인연들이, 세심한 경청이, 생각의 되새김질이, 해 뜨기 전의 적요한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프랑스로 떠날 때는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그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도 궁금해진다. 그럼, 최선을 다해 다음 장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영화감독, 장건재
작가의 말
파리의 밤, 흐들흐들한 영혼들이 외로움에 밤새 몸을 꼬았다. 파리의 밤은 그렇게나 외로웠다.
실은 파리에 가기 전까진 제대로 외롭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회피할 수 있는 너무 많은 장치가 한국에 존재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불안함이나 외로움이 내 마음을 잠식하려고 하면 나는 아주 쉽게 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에서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삶. 손을 뻗으면 기댈 수 있는 것들이 나에겐 너무나 많아서 간간이 나를 잠식하곤 했던 상처 같은 건 모두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프랑스에, 유럽에, 파리에 진한 향수를 느꼈다. 그곳이 내 집인 것처럼, 내 삶이 거기 있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그곳에 가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는 허영에 가득 찬 마음이 파리로 나를 이끌었다. 똑같은 것이 지겹고 싫었던 마음의 이면에는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도 질려버리면 어쩌나, 변화 없이 지겨운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불안한 마음과 낮은 자존감에서 도망치고 회피하다 보면 결국 발 디딜 곳을 영원히 찾지 못하는 법이지만, 그때 나는 그걸 몰랐다.
반면 왜 그렇게 파리의 삶이 시궁창 같았을까를 생각해보면, 아마 ‘설국열차’ 삼등칸에서 꼬리칸으로 밀려나는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한국의 여성은 20대에 ‘젊음’과 ‘외모’라는 힘으로 유일하게 남자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다고 말했다. 그 찬란하던 시절, 좋았던 삶을 뒤로하고 더 나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곳으로 갈 때의 마음은 상상치 못한 인종차별과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행정 서류들과 절차, 가난과 외로움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똑똑한 학생,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좋은 사람, 멋진 인생에 포지셔닝 되어있던 삶이 사람들의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도움을 청해도 못 들은 척하는 스물셋 남짓한 아이들 속의 동양인 유학생 포지션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나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거나 타자의 위치를 상상해 볼 여지가 드물었다. 50여 명 빼곡히 찬 강의실 한 켠에 있던 한두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 농촌에 팔려 오듯 시집온 결혼이민자들, 굳이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인정받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감내하는 게 익숙해져 버린 어떤 부류의 사람들같이 이 사회에 존재하지만 나와 엮일 일이 없었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에 있었을까? 나 자신의 인정욕구에 급급했던 그 시절의 나는 그런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와 같은 시기에 파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감탄하는 프랑스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프랑스에서 받던 멸시가 사라지고, 친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한국에 왔는데, 나는 꿈꾸던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성공한 유학’인지 모르겠지만 ‘객관적으로’ 좋은 기업에 많은 연봉을 받는 직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것 같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쟁의 한복판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프랑스라는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온 난민처럼 벌거벗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 사회에서도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어깨를 잔뜩 위축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하면서도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더 이상 상처받기 싫었기에 경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상처를 통해 이상한 인류애를 얻었다. 한국이 마치 전체주의 나라처럼 느껴지는 건, 프랑스가 자유와 평등의 나라여서가 아니라, 한국은 프랑스보다 더 노골적인 형태로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상처받고 외롭고 인정받지 못했던 경험은 비단 나뿐이 아니라 나와 같은 시기에 있었던 파리 유학생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이상한 인류애의 실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 가끔 프랑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련해지곤 한다. 프랑스에 남은 이들은 한국의 이런 형태의 토탈리즘을 견딜 수가 없어 그대로 황무지에 남은 사람같이 느껴진다.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 노동당, 에이즈에 걸린 성 소수자, 다자연애자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프랑스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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