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에 재고만이 쌓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농담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삶을 솔직하게 설명하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보낸 시간들, 어설픈 도전과 사소한 실패들, 그리고 그 속에서 건져 올린 조각 같은 이야기들. 이 책은 그 흔적을 기록한 에세이집입니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친절에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면서 세상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버스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 손에 쥔 동전의 온기,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과의 대화처럼,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도 삶 속에서 의미 없는 재고처럼 느껴지는 것들 속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속의 문장
발이 푹푹 빠졌다. 구글맵으로 어떤 숙소가 괜찮은지 보려 했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발로 찾았다. 같이 온 여행객들에게는 알혼섬에서 제일 좋은 숙소를 안내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여덟 시까지 그 숙소 로비에서 모이자는 말을 전하고 나왔다. 숙소에서 나오자, 알혼섬은 이미 어두워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별이 상당히 잘 보였지만 눈앞을 밝혀주진 못했다. 전기공급이 약한 건 둘째 치고 가로등 따위도 적은 섬이라 아이폰 빛에 의지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모래밭 위를 걷고 있었고, 신발에는 어느새 모래가 잔뜩 들어왔다.
초등학생 때 신발에 들어간 모래를 자주 털어냈다. 당시 살던 아파트 앞에 폐타이어가 박혀 있는 모래 놀이터가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면 책가방을 그네 옆에 던져두고 저녁 식사 전까지 거기에서 놀았다. 특히 당시 단짝이었던 병윤이와 놀이터에 깔린 모래를 손으로 휘저으며 조개껍데기를 모으며 놀곤 했다. 그리고 각자 발견한 조개껍데기 중 가장 강해 보이는 것을 내세워 조개싸움을 했다. 엄지를 껍데기 안쪽 움푹 들어간 곳에 대고, 바닥에 놓인 상대방의 조개를 짓누르는 방식이었다. 두 껍데기 중 깨지지 않은 쪽이 이긴 걸로 했지만, 결과가 나왔을 때는 매번 엄지에 붙어있는 조개껍데기보다 바닥에 조각난 껍데기가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린 가격표가 보였다’ 중에서
네 시간 정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새 어둡게만 보이던 언덕이 사라졌고 우리는 드디어 얼음이 아닌 땅을 밟았다. 불필요해진 스케이트를 갈아 신으니, 까쨔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마을 사람들이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두었다. 감자 퓨레, 메밀밥, 닭고기였다. 식사를 받아들고 빈 바닥 아무 곳에 앉았다. 음식물을 씹으면서 왔던 길을 돌아봤는데 시작점이 점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땠냐”고 까쨔가 물어봤고, “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하길 잘했다”라고 대답했다.
아까 받은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간단하게 먹었지만, 배 속이 충분히 찼다. 얼어붙은 바이칼을 보고 있으니, 삶을 지나오면서 고민 끝에 ‘안’한 일들이 저 안-에 잠겨있겠구나 싶었다. 스케이트를 벗은 발에는 더욱 편한 신발이 신겨 있는 게 보였고, 이제는 아무리 냉랭해도 하지 않을 일보다 할 일들이 많아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느 날 내 안이 가득 따뜻해졌을 때, 얼음을 살짝 깨 낚시를 하듯이 이전에 하지 않았던 일까지 언젠간 건져 올리길 바랐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중에서
나에게 있어 신동의 결혼식은 신동이 생각하는 만큼 커다란 의미를 가진 결혼식이 아니었다. 어쩌면 한국에 잠깐 귀국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동에게 먼 나라에서 누군가가 와줬다는 그 일은 좋은 기억을 쌓게 하는 일이었고, 결국 하나의 의미 있는 막대그래프가 됐다. 타인이 쌓게 될 막대그래프를 넘어서, 내가 그동안 잊고 있던 나만의 막대그래프는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이리나 학장이 내 이름의 의미를 물었던 것처럼. -‘별 의미 없는 색칠 공부’ 중에서
유첸이 한 말을 내가 초등학생 때 들었다면, 체력장 때 했던 달리기 측정이 그리 창피하지 않았을까. 그늘이 드리운 스탠드 앞에서 담임 선생님이 라인기를 끌며 하얀 줄을 그리고 있었다. 달리기를 위한 트랙을 만드는 중이었다. 선생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가 흔들릴수록 트랙은 점점 완성되어 갔다. 완성된 트랙에는 5명씩 번호순대로 줄 맞춰 섰다. 성 씨가 김인 나는 매 학년 10번 근방의 번호를 받았다. 그래서 보통 2회 안에 트랙으로 나섰다. 트랙에 서고, 선생님이 오른손엔 초시계를 들고, 왼손으로 호루라기를 입에 가져다 댈 때면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이유는 달리기가 느려서였다. 느린 속도가 창피했다. 그때는 이 트랙이 내가 가진 속도를 측정하기 위한 장치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보다 빠르게 뛰어야만 하는 줄 알았다. - ‘경쟁이 아니야’ 중에서
저자 소개
김진원
영하 40도의 시베리아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마음의 온도를 천천히 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숙사에 재고만이 쌓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농담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삶을 솔직하게 설명하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보낸 시간들, 어설픈 도전과 사소한 실패들, 그리고 그 속에서 건져 올린 조각 같은 이야기들. 이 책은 그 흔적을 기록한 에세이집입니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친절에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면서 세상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버스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 손에 쥔 동전의 온기,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과의 대화처럼,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도 삶 속에서 의미 없는 재고처럼 느껴지는 것들 속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속의 문장
발이 푹푹 빠졌다. 구글맵으로 어떤 숙소가 괜찮은지 보려 했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발로 찾았다. 같이 온 여행객들에게는 알혼섬에서 제일 좋은 숙소를 안내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여덟 시까지 그 숙소 로비에서 모이자는 말을 전하고 나왔다. 숙소에서 나오자, 알혼섬은 이미 어두워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별이 상당히 잘 보였지만 눈앞을 밝혀주진 못했다. 전기공급이 약한 건 둘째 치고 가로등 따위도 적은 섬이라 아이폰 빛에 의지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모래밭 위를 걷고 있었고, 신발에는 어느새 모래가 잔뜩 들어왔다.
초등학생 때 신발에 들어간 모래를 자주 털어냈다. 당시 살던 아파트 앞에 폐타이어가 박혀 있는 모래 놀이터가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면 책가방을 그네 옆에 던져두고 저녁 식사 전까지 거기에서 놀았다. 특히 당시 단짝이었던 병윤이와 놀이터에 깔린 모래를 손으로 휘저으며 조개껍데기를 모으며 놀곤 했다. 그리고 각자 발견한 조개껍데기 중 가장 강해 보이는 것을 내세워 조개싸움을 했다. 엄지를 껍데기 안쪽 움푹 들어간 곳에 대고, 바닥에 놓인 상대방의 조개를 짓누르는 방식이었다. 두 껍데기 중 깨지지 않은 쪽이 이긴 걸로 했지만, 결과가 나왔을 때는 매번 엄지에 붙어있는 조개껍데기보다 바닥에 조각난 껍데기가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린 가격표가 보였다’ 중에서
네 시간 정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새 어둡게만 보이던 언덕이 사라졌고 우리는 드디어 얼음이 아닌 땅을 밟았다. 불필요해진 스케이트를 갈아 신으니, 까쨔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마을 사람들이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두었다. 감자 퓨레, 메밀밥, 닭고기였다. 식사를 받아들고 빈 바닥 아무 곳에 앉았다. 음식물을 씹으면서 왔던 길을 돌아봤는데 시작점이 점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땠냐”고 까쨔가 물어봤고, “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하길 잘했다”라고 대답했다.
아까 받은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간단하게 먹었지만, 배 속이 충분히 찼다. 얼어붙은 바이칼을 보고 있으니, 삶을 지나오면서 고민 끝에 ‘안’한 일들이 저 안-에 잠겨있겠구나 싶었다. 스케이트를 벗은 발에는 더욱 편한 신발이 신겨 있는 게 보였고, 이제는 아무리 냉랭해도 하지 않을 일보다 할 일들이 많아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느 날 내 안이 가득 따뜻해졌을 때, 얼음을 살짝 깨 낚시를 하듯이 이전에 하지 않았던 일까지 언젠간 건져 올리길 바랐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중에서
나에게 있어 신동의 결혼식은 신동이 생각하는 만큼 커다란 의미를 가진 결혼식이 아니었다. 어쩌면 한국에 잠깐 귀국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동에게 먼 나라에서 누군가가 와줬다는 그 일은 좋은 기억을 쌓게 하는 일이었고, 결국 하나의 의미 있는 막대그래프가 됐다. 타인이 쌓게 될 막대그래프를 넘어서, 내가 그동안 잊고 있던 나만의 막대그래프는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이리나 학장이 내 이름의 의미를 물었던 것처럼. -‘별 의미 없는 색칠 공부’ 중에서
유첸이 한 말을 내가 초등학생 때 들었다면, 체력장 때 했던 달리기 측정이 그리 창피하지 않았을까. 그늘이 드리운 스탠드 앞에서 담임 선생님이 라인기를 끌며 하얀 줄을 그리고 있었다. 달리기를 위한 트랙을 만드는 중이었다. 선생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가 흔들릴수록 트랙은 점점 완성되어 갔다. 완성된 트랙에는 5명씩 번호순대로 줄 맞춰 섰다. 성 씨가 김인 나는 매 학년 10번 근방의 번호를 받았다. 그래서 보통 2회 안에 트랙으로 나섰다. 트랙에 서고, 선생님이 오른손엔 초시계를 들고, 왼손으로 호루라기를 입에 가져다 댈 때면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이유는 달리기가 느려서였다. 느린 속도가 창피했다. 그때는 이 트랙이 내가 가진 속도를 측정하기 위한 장치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보다 빠르게 뛰어야만 하는 줄 알았다. - ‘경쟁이 아니야’ 중에서
저자 소개
김진원
영하 40도의 시베리아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마음의 온도를 천천히 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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