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한국 디자인사는 어떻게 쓰여왔는가, 그리고 누구의 시선으로 쓰였는가? 우리의 디자인사에는 수많은 협업자로 구성된 디자인 현장과 그 속에서 묵묵히 일해온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누락되어 있다.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는 영웅적 개인과 기념비적 작업으로 쓰여온 매끈한 한국 디자인사에 의문을 표하며 지역, 현장, 여성의 목소리로 보편사의 공백을 풍부하게 채워넣는다.
1963년생 이영희는 1990년대 초반, 대구에서 편집 디자인 회사 ‘그래콤’을 설립한 후 30여 년간 사보와 사사를 중심으로 한 상업 출판 활동을 전개했다. 이 프로젝트는 이영희를 필두로 지역에서 활동한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구술과 아카이브로, 한국 디자인의 과거를 바라보는 대안적 방법론을 탐구한다. 이는 한국 디자인사의 기록되지 않은 가장 보편적인 얼굴과 서사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인물
이종백은 1962년 대구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영남대학교 출판부에 입사한 후, 기획과 편집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현재 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한국문화사상대계», «퇴계 시풀이»를 비롯해 30여 년간 한국학과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다양한 학술서들을 꾸준히 펴냈다. 지역 대학 출판부의 기획편집자로서 지역문화총서를 기획하였고, 청년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여 출판으로 지원하는 등 학술출판을 바탕으로 출판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찬수는 1961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공업고등학교와 대구공업전문대학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했다. 남산동 인쇄골목의 ‘도안사’로 지역 디자인계에 첫 발을 내딛고, 동아쇼핑 판촉부를 거쳐 1980년대 중반 서진기획에서 사보를 만드는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관계로 이영희를 만나 그래콤을 함께 열었다. 이영희와 함께 30여 년간 대구·경북의 사외보를 비롯한 인쇄 홍보물과 출판물 수백 종을 디자인했다. 지금은 팔공산 인근에서 목공방 ‘이목공작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영희(이어진)는 1963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며 대학교 부설 편집국의 편집자로 일하던 중 편집 디자인계에 입문했다. 첫 직장이었던 서진기획에서 이찬수를 만났고, 1990년대 초반 기획편집자와 디자이너의 관계로 편집 디자인 전문 회사인 ‘그래콤’을 설립했다. 이후 30여 년간 지역에서 사보와 사사를 중심으로 한 상업 출판,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증언
“인쇄소에서 조판을 해온 교정지를 받아서 저자 교정을 넘겼더니 수정이 거의 없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만 문선공들이 한문에는 박사급이었던 거죠. 수십 년 동안 하시던 분들이다 보니까 아무리 갈겨쓰고 약자를 써도 문선은 정확하게 하는 게 참 신기했어요. 또 교정하면서 삭제하거나 추가하는 문장이 있으면 촘촘하게 이미 한 페이지씩 짜놓은 활자들을 다시 짜야 하거든요? 우예 하나 싶었는데 손놀림이 신기에 가깝더라고요.”
“막상 매킨토시를 구입하고 보니 아무도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후에 시내에 전산 조판을 가르치는 학원이 몇 군데 생겼지만 매킨토시를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도, 교재도 없는 거예요. 전문가를 뽑아야 하는데 경력 있는 디자이너가 있어야죠. 그래서 응용미술학과 학과장님을 찾아가서 매킨토시로 북디자인을 할 친구가 필요하니 학생을 소개해 달라고 이야기했죠. 학교에서도 매킨토시와 그래픽 프로그램을 가르쳐주지 않던 시절이다 보니 일단 편집에 관심 있는 졸업 예정자 학생을 채용했어요. 이 친구하고 내하고 밤샘 해가면서 원서를 보며 기능을 익히고 시행착오를 어마어마하게 겪었죠. 시스템을 세팅하는 데도 몇 주가 걸렸을 거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지만 시도해 보면서 대구에서도 서울 못지않은 출판물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늘 보여주고 싶어요. 그게 지역 출판을 활성화하는 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때는 디자인하면 다 광고였고, 편집 디자이너라는 말 자체가 듣기 힘들었던 시대였으니까…. 가르쳐주는 선배도 없었고 앞에 나왔던 책자를 보면서 이건 그대로 따라 해야겠다, 이거는 다르게 디자인해야겠다, 혼자 궁리하면서 디자인을 했지. 디자이너가 지면의 레이아웃을 스케치하고 글자의 크기나 모양을 지정해 주면 오퍼레이터가 사진 찍듯 폰트 하나하나를 찍어서 인화지에 출력해 줬어. 인화지를 받아와서 부분부분 잘라 대지에 미리 그어 놓은 선, 사진과 삽화 자리에 맞춰 붙여 대지 화판 작업을 했었지.”
“지방에 있으니까 자극을 줄 만한 작업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 서울에 안상수 씨나 안그라픽스의 작업 정도를 보면 자극을 받았지. 김형윤편집회사에서 나오는 편집물도 종종 봤고 대통기획이라고 충무로에 편집 디자인 회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나온 잡지가 꽤 괜찮았어. 직원들이 충무로에 출장 가서 학생인 척 이 책의 디자인을 과제물에 참고하고 싶다고 몇 권 얻어서 오면 구독 신청 해서 받아봤지. 이론적으로 누군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보는 게 제일 큰 공부였어.”
“우리의 사보와 사사를 언젠가 만든다면 어떨까, 생각하고 찍어둔 사진이 많았는데 없어졌어. 그게 있으면 참 재밌을텐데. 처음에 그래콤을 열면서 미용실 자리에 문을 하얗게 칠하고 간판 딱 달고 출발하던 그 시절 사진이 다 있었는데….”
“지금도 남산동 가서 가게 하나 내놓고 돌아다니면 일이 있을지 몰라도 지금의 대구가 그때의 대구는 아니지. 그렇지만 그래콤을 처음 열었을 때의 우리처럼 지금도 지역에서 새로운 일을 벌이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거야.”
“광고 회사의 디자인실 사람들이 주로 보는 게 일본에서 들여오는 미국 디자인 책이었어. 그때는 원서를 취급하는 책장사가 보부상처럼 광고 회사에 돌아다녔어. 그런데 거기에서조차 대부분 광고 시안만 실려 있지, 편집 디자인이라고 할 만한 건 별로 없었거든. 그래서 광고 시안을 편집에 참고해서 레이아웃을 짜서 디자인하던 시대였어.”
“주변에 운동권의 대부라든지 이념 서적을 만드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던 선배가 많았거든. 선배가 밤에 남산동 인쇄골목으로 가자고 하면, 비밀리에 홍보물을 만든다는 뜻이었어. 학교에서 찍은 사진이나 걸개그림을 그리는 선배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가지고 문구도 고안하면서 홍보물 만드는 걸 도와줬었어. 돈도 없고 밤에 빨리빨리 뽑아야 됐으니까 선배가 아는 작은 인쇄소에서 1도기로 찍어냈었지.”
“같은 연도에 카피라이터로 들어온 동기 남자애가 나보다 월급을 훨씬 더 많이 받고 있더라고. 나는 나 혼자서 수많은 사보를 기획하고 아무도 모르는 편집 디자인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실적도 냈는데 분하잖아. 관리이사한테 얘기하니까 세상이 이런 걸 어떡하냐는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사표를 썼어. 그때가 스물여덟이었어. 남산교회 맞은편에 미용실 하던 자리가 있었는데 퇴직금 100만원으로 책상 두 개 넣고 독립했어. 거기서 그래콤을 시작했던 거야.”
“20대에는 여성성보다는 강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몸에 뱄던 것 같아. 대학 다닐 때도 편집국에서 일하랴, 야간에는 영문과 수업, 낮에는 신방과 수업을 들으면서 미팅을 한 번도 안 했거든. 용돈 벌어야 돼서 알바를 정말 많이 하다 보니까… 그때부터 시간에 쫓기는 일생이었어. 사업 초기에도 여자로 보이기를 꺼려서 치마를 입는다든지 이런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지.”
“그래콤에서 사사를 만들면서 내가 보람을 느낀 게 결국은 그 회사에 오래 일한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원고를 만들어야 했거든.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으니까 기억에 의존해야 되는 거야.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받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남아있어. 그때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을 것 같아.”
이민규
imingyu.neocities.org
* 2023년 whatreallymatters의 「3, 2, wrm, Action!(우수콘텐츠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입니다.
책 소개
한국 디자인사는 어떻게 쓰여왔는가, 그리고 누구의 시선으로 쓰였는가? 우리의 디자인사에는 수많은 협업자로 구성된 디자인 현장과 그 속에서 묵묵히 일해온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누락되어 있다.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는 영웅적 개인과 기념비적 작업으로 쓰여온 매끈한 한국 디자인사에 의문을 표하며 지역, 현장, 여성의 목소리로 보편사의 공백을 풍부하게 채워넣는다.
1963년생 이영희는 1990년대 초반, 대구에서 편집 디자인 회사 ‘그래콤’을 설립한 후 30여 년간 사보와 사사를 중심으로 한 상업 출판 활동을 전개했다. 이 프로젝트는 이영희를 필두로 지역에서 활동한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구술과 아카이브로, 한국 디자인의 과거를 바라보는 대안적 방법론을 탐구한다. 이는 한국 디자인사의 기록되지 않은 가장 보편적인 얼굴과 서사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인물
이종백은 1962년 대구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영남대학교 출판부에 입사한 후, 기획과 편집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현재 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한국문화사상대계», «퇴계 시풀이»를 비롯해 30여 년간 한국학과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다양한 학술서들을 꾸준히 펴냈다. 지역 대학 출판부의 기획편집자로서 지역문화총서를 기획하였고, 청년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여 출판으로 지원하는 등 학술출판을 바탕으로 출판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찬수는 1961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공업고등학교와 대구공업전문대학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했다. 남산동 인쇄골목의 ‘도안사’로 지역 디자인계에 첫 발을 내딛고, 동아쇼핑 판촉부를 거쳐 1980년대 중반 서진기획에서 사보를 만드는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관계로 이영희를 만나 그래콤을 함께 열었다. 이영희와 함께 30여 년간 대구·경북의 사외보를 비롯한 인쇄 홍보물과 출판물 수백 종을 디자인했다. 지금은 팔공산 인근에서 목공방 ‘이목공작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영희(이어진)는 1963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며 대학교 부설 편집국의 편집자로 일하던 중 편집 디자인계에 입문했다. 첫 직장이었던 서진기획에서 이찬수를 만났고, 1990년대 초반 기획편집자와 디자이너의 관계로 편집 디자인 전문 회사인 ‘그래콤’을 설립했다. 이후 30여 년간 지역에서 사보와 사사를 중심으로 한 상업 출판,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증언
“인쇄소에서 조판을 해온 교정지를 받아서 저자 교정을 넘겼더니 수정이 거의 없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만 문선공들이 한문에는 박사급이었던 거죠. 수십 년 동안 하시던 분들이다 보니까 아무리 갈겨쓰고 약자를 써도 문선은 정확하게 하는 게 참 신기했어요. 또 교정하면서 삭제하거나 추가하는 문장이 있으면 촘촘하게 이미 한 페이지씩 짜놓은 활자들을 다시 짜야 하거든요? 우예 하나 싶었는데 손놀림이 신기에 가깝더라고요.”
“막상 매킨토시를 구입하고 보니 아무도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후에 시내에 전산 조판을 가르치는 학원이 몇 군데 생겼지만 매킨토시를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도, 교재도 없는 거예요. 전문가를 뽑아야 하는데 경력 있는 디자이너가 있어야죠. 그래서 응용미술학과 학과장님을 찾아가서 매킨토시로 북디자인을 할 친구가 필요하니 학생을 소개해 달라고 이야기했죠. 학교에서도 매킨토시와 그래픽 프로그램을 가르쳐주지 않던 시절이다 보니 일단 편집에 관심 있는 졸업 예정자 학생을 채용했어요. 이 친구하고 내하고 밤샘 해가면서 원서를 보며 기능을 익히고 시행착오를 어마어마하게 겪었죠. 시스템을 세팅하는 데도 몇 주가 걸렸을 거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지만 시도해 보면서 대구에서도 서울 못지않은 출판물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늘 보여주고 싶어요. 그게 지역 출판을 활성화하는 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때는 디자인하면 다 광고였고, 편집 디자이너라는 말 자체가 듣기 힘들었던 시대였으니까…. 가르쳐주는 선배도 없었고 앞에 나왔던 책자를 보면서 이건 그대로 따라 해야겠다, 이거는 다르게 디자인해야겠다, 혼자 궁리하면서 디자인을 했지. 디자이너가 지면의 레이아웃을 스케치하고 글자의 크기나 모양을 지정해 주면 오퍼레이터가 사진 찍듯 폰트 하나하나를 찍어서 인화지에 출력해 줬어. 인화지를 받아와서 부분부분 잘라 대지에 미리 그어 놓은 선, 사진과 삽화 자리에 맞춰 붙여 대지 화판 작업을 했었지.”
“지방에 있으니까 자극을 줄 만한 작업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 서울에 안상수 씨나 안그라픽스의 작업 정도를 보면 자극을 받았지. 김형윤편집회사에서 나오는 편집물도 종종 봤고 대통기획이라고 충무로에 편집 디자인 회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나온 잡지가 꽤 괜찮았어. 직원들이 충무로에 출장 가서 학생인 척 이 책의 디자인을 과제물에 참고하고 싶다고 몇 권 얻어서 오면 구독 신청 해서 받아봤지. 이론적으로 누군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보는 게 제일 큰 공부였어.”
“우리의 사보와 사사를 언젠가 만든다면 어떨까, 생각하고 찍어둔 사진이 많았는데 없어졌어. 그게 있으면 참 재밌을텐데. 처음에 그래콤을 열면서 미용실 자리에 문을 하얗게 칠하고 간판 딱 달고 출발하던 그 시절 사진이 다 있었는데….”
“지금도 남산동 가서 가게 하나 내놓고 돌아다니면 일이 있을지 몰라도 지금의 대구가 그때의 대구는 아니지. 그렇지만 그래콤을 처음 열었을 때의 우리처럼 지금도 지역에서 새로운 일을 벌이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거야.”
“광고 회사의 디자인실 사람들이 주로 보는 게 일본에서 들여오는 미국 디자인 책이었어. 그때는 원서를 취급하는 책장사가 보부상처럼 광고 회사에 돌아다녔어. 그런데 거기에서조차 대부분 광고 시안만 실려 있지, 편집 디자인이라고 할 만한 건 별로 없었거든. 그래서 광고 시안을 편집에 참고해서 레이아웃을 짜서 디자인하던 시대였어.”
“주변에 운동권의 대부라든지 이념 서적을 만드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던 선배가 많았거든. 선배가 밤에 남산동 인쇄골목으로 가자고 하면, 비밀리에 홍보물을 만든다는 뜻이었어. 학교에서 찍은 사진이나 걸개그림을 그리는 선배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가지고 문구도 고안하면서 홍보물 만드는 걸 도와줬었어. 돈도 없고 밤에 빨리빨리 뽑아야 됐으니까 선배가 아는 작은 인쇄소에서 1도기로 찍어냈었지.”
“같은 연도에 카피라이터로 들어온 동기 남자애가 나보다 월급을 훨씬 더 많이 받고 있더라고. 나는 나 혼자서 수많은 사보를 기획하고 아무도 모르는 편집 디자인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실적도 냈는데 분하잖아. 관리이사한테 얘기하니까 세상이 이런 걸 어떡하냐는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사표를 썼어. 그때가 스물여덟이었어. 남산교회 맞은편에 미용실 하던 자리가 있었는데 퇴직금 100만원으로 책상 두 개 넣고 독립했어. 거기서 그래콤을 시작했던 거야.”
“20대에는 여성성보다는 강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몸에 뱄던 것 같아. 대학 다닐 때도 편집국에서 일하랴, 야간에는 영문과 수업, 낮에는 신방과 수업을 들으면서 미팅을 한 번도 안 했거든. 용돈 벌어야 돼서 알바를 정말 많이 하다 보니까… 그때부터 시간에 쫓기는 일생이었어. 사업 초기에도 여자로 보이기를 꺼려서 치마를 입는다든지 이런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지.”
“그래콤에서 사사를 만들면서 내가 보람을 느낀 게 결국은 그 회사에 오래 일한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원고를 만들어야 했거든.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으니까 기억에 의존해야 되는 거야.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받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남아있어. 그때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을 것 같아.”
이민규
imingyu.neocities.org
* 2023년 whatreallymatters의 「3, 2, wrm, Action!(우수콘텐츠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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